연필이 가는 길 28

머리 염색

부모님이 물려준 유전자 중에 새치가 있다. 외할아버지-엄마-나로 내려온 유전인자는 40대 초반부터 염색을 하게 했다. 20여 년을 했더니 너무 지겨워서 퇴직하면 젤 먼저 버릴 것에 '염색하기'를 넣었었다. 금연을 선언하는 사람처럼 주변에 퇴직만 하면 염색을 안 하겠다 선언하고 다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럼 안된다고 말렸지만, 흰색인 머리카락을 상상해 보면 괜찮을 거 같았다.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는 이면에 샴푸 하면 점점 갈변이 된다는 신발명 샴푸를 내심 믿었다. 염색 대신 그 샴푸를 쓰면 화학적 염색 대신 자연 염색이 될 거라고, 잠시만 참자 생각했다.  염색을 안 하고 한 달쯤 되니 정수리에 흰 달이 두둥 떠올랐다. 한 번에 백발이 되는 염색약이 있다면 차라리 그러고 싶었다. 반백도 아니고 몇 가닥 ..

21 제주에서 한 달 살기-가을

잠깐잠깐 몇 날씩 집 떠났다 돌아오는 여행은 많이 하고, 등반 때문에 해외에 나가 몇 달 있기도 했지만, 국내에서 긴 기간 동안 한 숙소에서 지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제주에서 한 달살이.버킷리스트엔 퇴직 후 하고픈 일이 빼곡히 쓰여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제주에서 1년 살기였다. 그러나 1년 동안 집을 비워둬야 한다는 사실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아 계절별 한 달 살기로 바꾸었는데 그 처음이 21년 11월 1일~25일까지였다. 1 달이라고 해도 막상 한 달이 쉽지 않았던 게 11월 초엔 빠지면 안 될 집안일이, 말엔 꼭 참석해야 할 결혼식이 있었기 때문에 한 달을 온전히 비운다는 것이 되지 않았다.꼭 필요한 것이라 생각되는 것만 챙겼음에도 한 가득인 짐과 친구이자 동료이자 이웃이자 동거인인 남편과 5시 3..

이창동 감독의 "시"를 보고

이창동 감독의 "시"/칸 영화제에서 각본상 받음 영화 속에는 우리나라 축소판 세상이 있었다. 치매초기의 깜빡깜빡하는 증상이 시작되는 60대 주인공은 얼마 안 있으면 될 거 같은 내 모습이었고, 성폭력에 시달리다 자살을 한 여학생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고, 죄를 짓고도 최소한의 죄책감이나 반성이 없는 손자는 주변에 흔히 보는 내 아이들이고, 아이들의 앞날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죄를 돈으로 막으려는 부모들과 학교는 이제 새삼 놀랄 거리도 아니었으며, 비리를 고발한 죄?로 한직으로 밀려난 경찰관과 자식의 목숨과 바꾼 합의금을 받으러 나온 가난한 엄마의 모습은.... 회색빛 절망이 가득할 거 같은 세상에서 그래도 아무쓰잘데 없는 시를 배우거나 알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의 허망하기까지 한 몸짓이 아름다우면서도 슬펐다..

길은 호기심이다

길은 호기심이다.하늘은 쪽빛으로 빛나고, 그 푸름을 배경으로 구름이 물처럼 흐른다. 산등성이에 두텁게 자리 잡은 눈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신발 아래서 서걱댄다. 사방은 눈밭이지만 햇살이 뜨거워서인지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흐른다. 하나, 둘, 셋,..일곱,. 열까지 세곤 또다시 멈춰 서서 심호흡. 해발 5,000m을 넘어가니 의식하지 않고 숨쉬는게 쉽지가 않다. 어제 밤을 꼴딱 새게 했던 전두엽의 두드림은 한결 나아졌지만 속은 아직도 매슥거린다.  사람들이 집을 짓고 모여 사는 곳으로부터 일주일을 걸어 안나푸르나를 만났다. 다시 4,310m의 베이스캠프를 지나 수 천 만년동안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면서 허물어지고 삭막해진 땅에서 불면의 하룻밤을 보낸 뒤, 떠오르는 해를 보며 나선 길에서 눈 사면을 만났다. ..

삶이란...

언제 내리는지 알 수 없는 롤러코스터를 계속해서 타는 것. 추상적인 단어의 실체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것.푹신하고 부드러운 양모 방석 안에 낀 가시 하나.텅 빈 냉장고 속에 있는 새콤한 사과 한 알.찜통 같은 날씨에 우듬지에서 흔들리는 나뭇잎 하나.행복한 웃음 저 너머 생각나는 그리운 기억.그리고  천사 혹은 악마? 같은 아이들.게다가  아직 시작하지 않은 것에  대한 기대가 더해지고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닌...                                     2006. 11. 29

빗소리

큰 소리에 유달리 귀가 예민해서- 뭔들 안 예민할까만은...아가들의 까르르 거리는 웃음도 아름다운 음악도 좋아하는 가수의 멋진 목소리도 조금 오래 들으면 다 소음으로 변합니다.그래서 노래방 가는 모임은 절대 사절이고모임에서 목소리 큰 친구 옆에는 절대 안 앉고귀마개는 제 가방의 필수품입니다.심지어 영화를 보러 가도 귀마개를 씁니다.멜로 영화조차 왜 그리 소리는 커야 하는 건지... 그러나 오래 들어도 소음으로 변하지 않는 것이 있으니...비 오는 창 밖을 내다보며 듣는 빗소리는종일 들어도 좋습니다.차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는 마치 아기 요정들의 발소리처럼 투당 거리며 화음이 안 맞긴 하지만 반투명해지는 유리창과 더불어 아늑함을 더해 줍니다.차를 타고 가다가 비를 만나면길가에 세워놓고 한 참을 앉아 있..

떠나지 않는 기차 역에서...

머물기 위해 떠나는 길.돌아오기 위해 나서는 발걸음.바람과 손잡고 흙을 만나고 나무를 안아 보면서그렇게 살아 있음을 끊임없이 확인해야 하는그 질긴 의심병 환자.그늘을 만들어 주느라 서 있는 굵은 나무 기둥.그가 그렇게 서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기다림을 이겨냈는지 그와 악수하면서 알았을까?                       2006. 9. 1    섬진강 옆 기찻길에서

담배와 땅콩크림

백해 무익하다는 담배.온갖 눈총을 다 받으면서도 그러나 죽어도 못 끊겠다고 - 진짜 죽는다면 다 후회하더라만!! 어쨌거나 구석에 정말 불쌍하게 피우고 있는 사람들.끊는 게 저렇게 안될까 이해가 안 됐습니다.난 땅콩크림을 엄청 좋아합니다.달거나 느끼한 걸 싫어하는데도 어쩐 일인지 이건 물리지가 않습니다.식빵에 '살짝' 바르는 것이 아니고 거의 0.5나 1cm는 되게 두껍게 발라서 먹는데거의 환상입니다.땅콩 크림을 좋아하게 된 것은...아마 C 레이션이라고 들어보셨나요?미군들 비상식량요.그 예전에만 해도 장기 산행을 가면 지고 갈 식량 무게가 만만치 않은데 이때 이 C레이션은 짱이였습니다. 미군용인데 이게 어찌 밖으로 나와 내 손까지 왔을까? 그땐 박스로 샀는데-C레이션 속에는 짜디짠 크래커와 같이 조그만 ..

2년 ... 靜中動의 시간

호기심으로 새로운 것에 한 눈 팔고낯설고 힘들고 어려워서 적응하느라 때론 눈물도 흘리고 마음도 상하며 끙끙대면서도조금씩 알아가는 재미를 만끽하다가어느덧 더 이상 낯선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될 때애써 생각하지 않아도 몸이 알아서 먼저 움직여질 때 그래서 또 다시 다른 것을 기웃거리게 되는 게 나에겐 언제나 2년이었습니다.직장을 다닐 때도 뭔가를 배울 때도 어느 날 조금씩 따분해지고 옆 자리를 힐끗거리는 자신을 보게 되면그때가 늘 2년 정도 되는 때였습니다.딱  2년 전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밀려오는 우울함에 울릉섬을 혼자 다녀온 후에또다시 열심히 다른 것을 배우고새 사람들을 만나고 쭈삣거리는 것이 사라져 이제 편해질 만하니또 곁눈질이 시작됩니다.때가 되면 혼자 꼬르륵 울어 대는 배꼽시계로시간이 흘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