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이 가는 길

머리 염색

낭가 2022. 1. 4. 17:56

부모님이 물려준 유전자 중에 새치가 있다. 외할아버지-엄마-나로 내려온 유전인자는 40대 초반부터 염색을 하게 했다. 20여 년을 했더니 너무 지겨워서 퇴직하면 젤 먼저 버릴 것에 '염색하기'를 넣었었다. 금연을 선언하는 사람처럼 주변에 퇴직만 하면 염색을 안 하겠다 선언하고 다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럼 안된다고 말렸지만, 흰색인 머리카락을 상상해 보면 괜찮을 거 같았다.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는 이면에 샴푸 하면 점점 갈변이 된다는 신발명 샴푸를 내심 믿었다. 염색 대신 그 샴푸를 쓰면 화학적 염색 대신 자연 염색이 될 거라고, 잠시만 참자 생각했다. 

 

염색을 안 하고 한 달쯤 되니 정수리에 흰 달이 두둥 떠올랐다. 한 번에 백발이 되는 염색약이 있다면 차라리 그러고 싶었다. 반백도 아니고 몇 가닥 검은색이 섞인 백발 머리카락이 새싹도 아닌 것이 새싹처럼 조금씩 올라오는 걸 보자니 정말 좋지 않았다. 그러다 코로나19 백신 1차를 맞게 되었고 심하게 부작용을 겪었다. 고열에 두통에 근육통에 며칠을 병자처럼 보내다 보니 올라온 흰머리가 더 마음을 심란하게 하였다. 딸에게 가장 옅은 색 염색약을 사 오라고 해서 염색을 했다. 머리카락 색이 옅어지면 올라오는 흰색과 명도 차가 덜나서 다 변할 때까지 괜찮을 거 같았다. 사온 염색약은 3개 한 묶음이니 세 번쯤 염색해서 검은 머리가 옅은 갈색이 되고  옅은 갈색에서 흰색으로  바뀌면 괜찮겠지 생각했다. 

 

갈변하는 샴푸는 남편이 먼저 써봤다. 생각보다 너무 늦게 변했다. 빛나는 흰색에서 두 달 이상이 지나야 옅은 갈색으로 빛이 꼬리를 내리는듯했다. 그것도 전체가 다 그렇게 되는 건 아니고 머리 상태에 따라 다른 건지 어떤 곳은 검정이 되고 어떤 곳은 여전히 흰색이었다. 아무튼 생각보다 너무 느리게 변했지만 변하곤 있으니 시간이 오래가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내 머리카락은 자기주장을 심하게 했다. 정수리에 뜨는 흰 달은 빛을 잃지도 않은 채 점점 커져갔다. 흰머리가 점점 큰 원을 그리니 친구들은 볼 때마다 '염색해라'를 외치고, 옷이나 외모를 잘 가꾸지 않으면 왠지 너저분해 보였다. 은행에 가면 엄청 씩씩한 걸음으로 들어감에도 '뭘 도와드릴까요' 외치며 다가오고, 식당에서 휴대폰이 빨리 작동하지 않으면 옆에 기다리던 젊은이가 대신 QR체크를 해주겠다고 휴대폰에 손을 내밀었으며 키오스크에서 메뉴를 고르고 있으면 뉜가 가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우리나라 좋은 나라, 그러나 어르신 대접을 받는 게 불편했다. 

 

어쨌든 거의 1년을 나름 애썼으나 결국 다시 염색하기로 했다. 염색 안 하기라는 한 가지를 편하고자 하니 다른 아홉 가지 불편함이 따르는 걸 알았다. 이건 금연처럼 정말 어떤 계기가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염색을 하고 거울을 보니 10년은 아니 적어도 5년은 젊은 내가 서있었다. 흰머리를 보며 무심코 '나도 이제 나이 들었구나' 생각했던 그 생각이 '아직 괜찮네'가 되었다. 염색을 한다는 것은 나를 속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나답게 보이게 하는 아이러니한 일이다. 일단 내 마음가짐에 변화가 있다는 것이 제일 크다. 염색하기라는 것을 버리진 못했지만 그러려고 노력했던 지난 1년이 헛되진 않았다는 생각이다. 앞으로 많은 날 중에 오늘이 제일 젊은 날이라는 게 실감 나는 오늘이다.                                

                                                  22.  1. 4    

무등산 서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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