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이 가는 길

길은 호기심이다

낭가 2012. 9. 11. 16:43

       

길은 호기심이다.

하늘은 쪽빛으로 빛나고, 그 푸름을 배경으로 구름이 물처럼 흐른다. 산등성이에 두텁게 자리 잡은 눈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신발 아래서 서걱댄다. 사방은 눈밭이지만 햇살이 뜨거워서인지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흐른다. 하나, 둘, 셋,..일곱,. 열까지 세곤 또다시 멈춰 서서 심호흡. 해발 5,000m을 넘어가니 의식하지 않고 숨쉬는게 쉽지가 않다. 어제 밤을 꼴딱 새게 했던 전두엽의 두드림은 한결 나아졌지만 속은 아직도 매슥거린다.

 

사람들이 집을 짓고 모여 사는 곳으로부터 일주일을 걸어 안나푸르나를 만났다. 다시 4,310m의 베이스캠프를 지나 수 천 만년동안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면서 허물어지고 삭막해진 땅에서 불면의 하룻밤을 보낸 뒤, 떠오르는 해를 보며 나선 길에서 눈 사면을 만났다. 이제 내가 오르고자 하는 곳은 해가 정면에 보이는‘락시피크’다.

목구멍이 반쯤 좁아진 듯 숨은 턱턱 막히고, 쇠로 만든 신발을 신은듯 내 딛는 발걸음이 무겁다. 한 걸음 내딛으면 반걸음은 밀려난다. 눈 구릉 뒤에는 뭐가 있을까! 나를 위로 위로 인도한 것은 바로 이 궁금증이었다. 그렇게 한 구릉을 지나면 또 다른 눈 사면이 보이고 그 위에 서면 뭐가 보일까 궁금해져서 또다시 숫자세기를 한다.

 

어릴 때 살던 집은 산 아래였다. 지금 생각하면 산이라기보다는 언덕정도 일듯한데 마땅히 놀 장난감이 없던 그 시절의 우리네 놀이터는 바로 그 언덕 기슭이였다. 초등학교 1학년쯤인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간식으로 삐비를 따먹고 풀잎을 찧고 꽃잎으로 장식하며 소꿉놀이를 하고 땅따먹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던 나는, 문득 산등성이를 돌아 길게 뻗은 길을 보았다. 그 길은 언제나 우리가 놀던 그 곳에서 있었는데 그 날 왜 내 눈에 처음인듯 들어 왔을까!

문득 그 길을 보는 순간 그 길로 가면 어디로 가게 될까 궁금해 졌고 그 길 끝에 무엇을 만나게 될지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겨우 두 사람이 걸을 만큼 좁은 길을 약간의 두려움과 기대를 가지고 걷기 시작했고, 끝없이 이어진 그 길을 걷고 또 걸었지만 늘 봐 오던 나무와 풀과 산등성이 뿐 기대했던 특별한 뭔가는 나타나지 않았다.

어느새, 해는 산 아래로 뉘엿뉘엿 떨어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이어지는 낯선 길 위에서, 문득 커다랗고 붉은 해를 만나는 순간 두려움이 몰려왔고 뒤돌아 왔던 길을 달리고 또 달려 어둑어둑 땅거미가 지는 순간에야 겨우 집에 도달할 수 있었다. 겁 없이 나선 그 길 끝에서 만나길 기대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10시50분 정상에 섰다. 8,000m봉우리를 병풍처럼 사방에 둘러치고, 아무도 지나간 적이 없는 눈밭에 서 있는 나. 왜 나는 이곳에 오른 것일까! 길도 나 있지 않는 산등성이를 올라 만난 또 다른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5,320m에 눈높이를 맞춰서 보는 세상은 다르다. 위에서 보면 세상은 참 작다. 세상의 부귀와 권력을 더 많이 가진다해도 그 또한 커다란 것의 한 귀퉁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내 삶을 풍요롭게 하는데 크게 소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금세 알게 된다. 나 자신에 충실해지고 작은 서운함엔 하하 웃을 수 있는 담대함이 생긴다. 산과 더불어 나도 큰다.

 

길을 가다가 새로운 길이 보이면 궁금증이 생긴다. 이 길은 어디로 가는 걸까, 어디로 이어지는 걸까, 그 길 어딘가에서 무엇을 만나게 될까 하고. 특히 큰 길 옆에 알지 못하는 곳으로 이어지는 작은 길을 보면 어김없이 그 쪽으로 발길을 향하고 있는 나를 본다. 마치 그 길이 ‘엘리스’가 찾아가는 “이상한 나라”로 가는 출입구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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