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이 가는 길

이창동 감독의 "시"를 보고

낭가 2012. 9. 11. 16:44

이창동 감독의 "시"/칸 영화제에서 각본상 받음

 

영화 속에는 우리나라 축소판 세상이 있었다. 치매초기의 깜빡깜빡하는 증상이 시작되는 60대 주인공은 얼마 안 있으면 될 거 같은 내 모습이었고, 성폭력에 시달리다 자살을 한 여학생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고, 죄를 짓고도 최소한의 죄책감이나 반성이 없는 손자는 주변에 흔히 보는 내 아이들이고, 아이들의 앞날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죄를 돈으로 막으려는 부모들과 학교는 이제 새삼 놀랄 거리도 아니었으며, 비리를 고발한 죄?로 한직으로 밀려난 경찰관과 자식의 목숨과 바꾼 합의금을 받으러 나온 가난한 엄마의 모습은.... 

회색빛 절망이 가득할 거 같은 세상에서 그래도 아무쓰잘데 없는 시를 배우거나 알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의 허망하기까지 한 몸짓이 아름다우면서도 슬펐다.

 

결국 주인공이 지은 시 한 수가 마지막에 낭독되면서 끝나는 영화는  너무나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영화다. 그 시는 이창동감독님이 고 노무현 대통령께 드리는 시라는 얘기가 있었는데 그렇게 생각하고 들으니 더 맘이 아팠다 -.-; 

 

    아네스의 노래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래소리 들리나요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나요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나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제 작별을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작별을 할 시간

이제 어둠이 오면 다시 촛불이 켜질까요
나는 기도합니다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의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 앉은 외로운 들국화까지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래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검은 강물을 건너기 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영화 개봉 전에는 영진위의 심사위원 한 명이( 누군지 다 아시죠?) 0점을 줬다해서 헛웃음이 나왔는데,  상을 받고 오자 칸에서 이창동 감독에게 예의상 상을 줬다는 망발로 또 한 번 웃게 한다. 진짜 웃픈 일 ㅜㅜ

 

이 좋은 영화를 보는데 참 힘들었다. 개봉은 했다는데 상영관을 못찾아서 극장을 다 뒤져 보니... 개봉관 하나,  일주일에 하루 그것도 단 두 번의 상영시간표를 보곤 참~~ 할 말이 없다. 아예 보지 말라고 하지...

 

어쨌거나 정치색을 떠나 정말 좋은 영화. 모든 연령이  봐도 다 내 얘기 같을... 오랜만에 감동이 있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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