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잠깐 몇 날씩 집 떠났다 돌아오는 여행은 많이 하고, 등반 때문에 해외에 나가 몇 달 있기도 했지만, 국내에서 긴 기간 동안 한 숙소에서 지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제주에서 한 달살이.
버킷리스트엔 퇴직 후 하고픈 일이 빼곡히 쓰여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제주에서 1년 살기였다. 그러나 1년 동안 집을 비워둬야 한다는 사실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아 계절별 한 달 살기로 바꾸었는데 그 처음이 21년 11월 1일~25일까지였다. 1 달이라고 해도 막상 한 달이 쉽지 않았던 게 11월 초엔 빠지면 안 될 집안일이, 말엔 꼭 참석해야 할 결혼식이 있었기 때문에 한 달을 온전히 비운다는 것이 되지 않았다.
꼭 필요한 것이라 생각되는 것만 챙겼음에도 한 가득인 짐과 친구이자 동료이자 이웃이자 동거인인 남편과 5시 30분 집을 출발, 7시에 목포항에서 '퀸제노비아'에 '켄타'(차)를 싣고, 9시에 제주를 향해 출발했다. 오랜만의 설렘 속에 약간의 염려를 숨기고 눈을 반짝인 시간.
사부작사부작, 놀멍 놀멍, 시나브로, 천천히 같은 단어를 즐기려 했건만 욕심 많은 발걸음은 날마다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으로 길 나서기 바빴고, 걸으면서 또 다른 곳을 바라보는 눈치 없는 마음 때문에 주변은 제대로 보지도 못하면서 그저 바빴던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날마다 걸어 다니느라 그동안 편안했던 육신은 여기저기서 비명을 질렀고 장딴지는 조선무가 되어 갔으며 아침에 첫마디는 '에고고'로 시작되었다. '오늘은 하루 쉴까? 그래, 하루 쉬자~' 했다가 아침을 먹고 나면 가고픈데가 생각나 '그냥 가보자'가 되풀이되는 날들이 이어졌다.
제주는 생각보다 참 넓었다. 몇 날을 돌아다녀도 또 갈 곳이 남았고 심지어 멀리 가는 이동 시간이 아까워 근처에서만 놀아도 다 돌아보지 못했다. 사람 많은 곳은 좋아하지 않아서 일명 관광지로 이름 있는 곳은 가지 않고 한라산, 한라산둘레길, 올레길, 오름만 다녀도 개미굴의 개미처럼 가야 할 곳이 계속 나왔다. '1달이나 25일이나 비슷하지 뭐'라고 생각했던 그 5일이 나와야 할 시간이 되자 못내 아쉬웠다. 그렇게 제주 한 귀퉁이의 가을을 보고 느끼고 만났고 그리고 헤어졌다.
네팔 안나푸르나 트레킹이 끝나고 심하게 '히말라야 블루'를 겪었었다. 울릉도를 다녀와서도 잠깐씩 그랬다. 누군가 '제주 블루'가 올 거라고 했지만 다행히도 그 정도는 아니었다. 다음이 있어서, 곧 볼 수 있어서 그럴 거라 생각된다. 뜻밖에 새로운 친구를 만나게 된 것도 제주가 준 선물이다. 앞으로 함께 걸어야 할 길들이 그려진다.
올해의 계획을 세운다. 제주에서 만날 봄이 벌써 설렌다^^
22년 1월 3일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