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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안나푸르나 트레킹(4)

낭가 2012. 9. 10. 14:52

7일;18일(수)

MBC-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4100) :2.9km

MBC-고소캠프(4800) :12km

5시 기상. 늦게야 겨우 든 잠을 털고 고양이 세수를 한다. 수돗가

에 물이 얼어있다. 6시 35분 출발 때 온도가 0도. 어둠을 쫓는 걸음

으로 힘차게 출발한다. 그러나 몸은 무겁고 가슴도 무겁다. 지금부

터 48시간만 열심히 움직일 수 있기를....  최대의 힘을 발휘하고 그

리고 다음은 생각지 말자.

7시50분 ABC의 모레인 지대에 도착 길을 찾는다. 셀파 노르부가

따라붙었다. 고소캠프까지 가기로 한 임대원이 심한 두통으로 포

기, 우리와 같이 가려고 왔단다. 20살 노르부와 17살 푸르바는 덴디

씨의 처남들이다.  이른 아침이라 모레인 지대의 길이 얼어있어 내

려가기는 조금 더 수월했다. 거의 서 있는 길을 무거운 짐을 지고도

고양이처럼  잘 내려간다. 이 길을 어떻게 내려갈까 걱정한 것은 괜

한 기우였다.

얼음이 녹아 돌 무더기와 물 웅덩이가 된 모레인 지대를 대각선으

로 가로질러 능선으로 붙는다. 머리 위에 걸려있는 큰 돌덩이가 위

태위태하다. 낮의 햇볕에 따뜻해지면 얼었던 흙더미는 녹으면서 돌

들이 굴러 떨어질 것이다. 아주 위험한 지역이다. 히운출리 건너편

에서는 눈사태가 나는지 대포소리가 펑펑난다. 능선에 올라서서 건

너편을 보니 장관이다. 모레인 지대가 U자형으로 커다란 '스케이트

보드'장처럼 생겼다.  

고소 증세로 두통과 구토를 하던 푸르바가 하산한다고 한다. 늘 고

산으로 다니는 셀파지만 자기가 경험해 보지 않은 고도에 오면 또

다시 고소증세를 겪는다. 잡풀이 많은 능선을 오르니 점점 식물들

이 작아지고 적어진다. 보통의 땅에선 보지 못한 이상한 세계가 펼

쳐지는 것이다. 긴 털을 늘어뜨리고 식물인지 동물인지 아리송한

풀이 E.T같다.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숨차면 숫자를 센다. 열까지

만 세자. 그리곤 쉬고 또다시 열 걸음. 4750m. 지금쯤 다른 사람들

은 ABC에 도착했을까?  ABC와 교신을 하니 우리가 올라가고 있는

것을 망원경으로 보고 있다고 한다.

오후가 되니 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하더니 앞이 안보이게 구름 속에

 갇혔다.  오후 2시40분 고소캠프에 도착했다. 모두들 고소와 싸우

느라 지친 표정이다. 셀파 노르부는 고소증으로 머리 아프다고 늘

어져 토한다. 내려가라니까 안 간단다. 셀파들은 올라온 높이가 곧

 경력이라 경력을 만들려고 안 내려가고 버티는 것이다. 셀파 장부

는 피켈을 들고 가더니 비닐에 얼음을 담아왔다. 우리의 식수다. 



컵라면을 먹고, 5000m 고소캠프에 텐트 3동을 치고 식량과 장비를

 정리했다. 사방은 몰려온 구름으로 기온이 뚝 덜어져 추웠고, 눈인

지 비인지 모를 뭔가가 내렸다. 텐트 바로 위에서부터 눈이 쌓여있

고 빙산처럼 탠트 피크가 보인다. 저녁 시간까지 2시간 정도 쉬기로

 했다.

깜박 잤을까? 밥 먹자고 일어나라는데 머리가 깨질 듯 아프다. 아직

까진 팔팔했는데 이제 시작인가 싶었다. 미역국을 말아 건네주는데

억지로도 먹을 수가 없었다. 머리가 아프니 속도 울렁거리고 만사

귀찮다.  토할거 같아서 먹지 않고  그냥 자기로 했다.



저녁 8시. 아픈 머리를 두드리며 비몽사몽하는데 다른 대원이 자는

 옆 텐트가 소란하다. 도저히 견디기가 힘들어서 200m 아래로 내려

간다는 것이다. 텐트를 개고 짐을 챙기는데 속이 울렁거려 도와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와 성개씨는 참을만 하여 진통제 한 알과 다

이아목스 한 알을 먹고 그냥 자기로 했다. 오늘 밤 그리고 내일 하

루만 잘 버텨다오.  별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세상은 별빛, 달빛

과 눈빛으로 환하다. 히말라야의 바람은 힘 센 코뿔소처럼 텐트를

치며 지나가고, 얼음 구멍으로 통째 빠져들 것만 같다.

  

8일; 19일(목)

모레인 빙하지대 탐사후 MBC

고소캠프-락시피크5320m(타푸출리 관찰)-MBC


 새벽 2시.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니 머리가 언제 그랬나 싶게 폭풍

우가 지나간 뒤 하늘처럼 개운하다. 그러나 다이아목스의 부작용으

로 손발과 온몸이 쩌릿쩌릿한게 기분 나쁘다. 먹은 물에 비해 오히

려 화장실도 안 가서 얼굴이 퉁퉁 부었다. 저녁을 못 먹은 터라 배

가 무지 고팠다. 사탕을 빨면서 장비를 챙기고 아래 내려간 대원들

을 기다렸다. 새벽하늘은 파랗게 빛나고 바람소리가 차다.



셀파 장부를 불러 물으니 내려간 사람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한다.

출발예정시간인 4시가 되어도 대원들이 오지 않아서 장부에게 내려

가 보라고 했으나 올라오기를 기다리라고 했다고 꼼짝 안하고 무전

기만 붙들고 있다. 춥다. ABC와 무전연락도 안되고 아래서 잔 대원

들에게 문제가 있는 건지 걱정이다. 서둘러도 빠듯한 시간에 늦으

면 안되는데.....

6시가 되니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끓인 물을 들고 장부를 보냈다. 혹 도움이 필요한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야할 텐트피크를 몇 장 찍었다. 원래계획은 4시에 출발하여 정상에 오른 뒤 다시 고소캠프에서 자는 것으로 꼬박 24시간을 잡았다. 6시 50분, 햇빛이 비치니 따뜻해진다.



얼마 후 장부와 두명의 대원이 올라왔다. 한대원은 너무 힘들어 올 수가 없단다. 국내 산에선 날아다니는 사람도 고소엔 어쩔수가 없나보다. 아침을 먹고  나와 두 대원과 셀파는 락시피크를 향해 출발하고 다른 대원들은 포터들과 하산하기로 했다.



한걸음 한걸음이 천근으로 뒤에서 뉜가가 잡아당기는 듯하다. 눈이

시작되는 곳에서 아이젠을 차고 장비를 추스린다. 눈 사면을 따라

또다시 하나 둘 셋........숫자 세기를 한다. 저 눈 구릉 뒤에는 뭐가

있을까! 나를 위로 위로 인도한 것은 바로 이 궁금증이였다. 그렇게

한 구릉을 지나면 또 다른 눈사면이 보이고 그 위에 서면 뭐가 보일

까 궁금해하면서 계속 숫자세기를 했다. 해가 떠서 덥다.



10시50분 정상에 섰다. 아무도 지나간 적이 없는 눈밭에 서서 사방

에 8000m봉우리를 병풍처럼 둘러치고 서 있는 나. 왜 나는 이곳에

오른 것일까! 5320m에 눈높이를 맞춰서 보는 세상은 다르다. 위에

서 보면 세상은 참 작다. 더 많은 권력과 돈과 명예를 가지려고 애

쓰는 것이 내 삶의 풍요완 큰 관계가 없다는 것을 금세 알게된다.

나 자신에 충실해지고 작은 서운함엔 하하 웃을 수 있는 담대함이

생긴다. 산과 더불어 나도 커진다.    

앞에 보이는 텐트피크는 손닿을 듯이 보이지만 여기저기 구멍이 드

러난 크레바스와 숨겨진 위험, 오만하게 힘껏 고개를 젖히고 있는

직벽이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실감한다. 고소적응이 되더라도 하

루에 끝내기는 역부족 일듯하다. 시간이 되면 직벽 아래까지라도

가보면 좋겠지만 참 서운하다. 본대와 무전교신을 하고 하산을

시작했다. 원래는 ABC에서 자기로 했는데 고소증 때문에 힘든 사

람이 많아져서 모두MBC로 내려왔단다.



고소캠프에 오니 강원도에서 왔다는 사람 3명이 있다. 본대는 3일

뒤에 오는데 텐트피크에 대한 정보를 묻는다. 포터들이 도망가서

먹을 것이 부족하다고 해서 남은 것들을 모두 주고 내려왔다.

 

점심때부터 구름이 올라와 오후가 되니 한치 앞도 안 보이는 안개 속이다. 삶이란 안개 속을 헤메는 것과 같다던 '헷세'의 시가 생각

난다. 산의 옆구리에 난 길이니 조금만 헛 딛으면 절벽이지만 내리

막에 고소 문제도 없으니 달리기하듯 모레인 지대까지 쌩~왔다. 

 돌 사이에 꼽힌 깃대를 보고 가는데 어디선가 길을 잃은 이가 있는

지 소리를 지른다. 길을 잃으면 깃발이 흔들며 내는 소리를 듣고 찾

아야 하는데 큰일이다. ABC를 지나는데 비가 오기 시작한다. 구름

올라 오는 시간이 날마다 빨라지더니 기어이 비가 온다. 고소 캠프

엔 눈 쌓일텐데 강원도 팀이 걱정이다. 우리도 하루만 일정이 늦었

으면 눈 때문에 무척 고생을 했을 것이다.



한참을 가니 키친보이 필립이 차와 비스켓을 가지고 마중 나왔다.

언제부턴가 특별히 내게 신경 써서 챙겨주는 마음을 따뜻한 '챠

이'의 맛과 함께 잊을 수 없을 것이다. MBC로 가니 모두 반겨준다.

여래왈 "왜 갑자기 늙었어요?" 얼굴은 퉁퉁 붓고 피곤에 절었으니

오늘의 일은 그 말에 다 담겼다. 그래도 오늘은 가장 편한 잠을 자

게 될 것이다. 하늘의 별이 더 빛난다.